안중근, 100년 앞을 내다 본 시대의 정치사상가
안중근, 100년 앞을 내다 본 시대의 정치사상가
  • By 이경호 (info@koreaittimes.com)
  • 승인 2015.12.02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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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하얼빈의 안중근 기념관

지난 9월 아베 정권은 집단적 자위권 행사 등을 담은 안보법안 법제화, 일본은 사실상 다시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가 됐다.

중국의 팽창을 우려한 미국이 일본과 동맹을 강화하고, 중국과 일본의 영토 분쟁으로 중일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되고 있는 등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이해관계가 해가 갈수록 복잡다단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지정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미국과 중국, 일본 그 어느 나라와도 소원한 외교관계를 견지할 수 없는 한국이 다시 구한말 제국주의 열강의 패권싸움의 한가운데 놓였다는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동양평화론’서 “침략 야욕 버리라” 일갈

이처럼 신패권 주의가 도래하고 있는 가운데 올해 안중근 의사의 순국 105주년을 맞아 그의 ‘동양평화론’이 재조명 받고 있다.

비록 미완성작이긴 하나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哈爾濱)역에서 제국주의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직후 옥중에서 저술한 책이다.

안 의사는 저서에서 당시를 ‘약육강식’의 시대로 평가하고, 일본 등 제국주의 세력들에게 약소국에 대한 침략 야욕을 버리라고 일갈(一喝)한다. 아시아국가들을 서구로부터 ‘해방’시켜 대동아 공영권 안에 포섭시키고, 일제를 중심으로 서구를 점령해 나가자는 대동아공영권을 꾸짖은 것이다.  

안 의사는 그러면서 한중일 동양3국이 서로 화합해 진보하면서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 화합하자고 당부한다.
전문가들은 100여년전에 집필한 저서인데도 불구하고 정치적 구상은 지금의 유럽공동체(EU)를 닮았고, 경제 부흥을 위해 역설했던 ‘공동은행’은 세계은행(IBRD)과 국제통화기금(IMF)이 대신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100년 후를 내다본 탁월한 정치사상가로 평가받는 그 이지만, 우리정부는 광복 이후 한국전쟁과 4·19혁명, 5·16 쿠데타 등 격동기를 겪는 와중에 안 의사에 대해 연구와 국민적 관심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1970년에서야 국민 성금 등으로 서울 남산 자락에 ‘안중근의사기념관’을 건립하기에 이른다. 이후 (사)안중근의사숭모회와 광복회의 노력으로 노무현 정부 때인 2010년 10월 정부 예산을 투입 새 기념관을 개관했다.
특히 지난 11월에는 국회헌정기념관에 그의 동상이 들어서 국회를 찾는 일반국민들은 물론, 정치인들에게 그의 업적과 넋을 기리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11월 11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있은 안중근 의사 동상 제막식

<>하얼빈 기념관 중국인 관람객 더 많아

중국 또한 동양평화에 대한 안 의사의 충정과 기개를 높이 사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장소인 하얼빈역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설립하는 한편, 안 의사의 유해 발굴에도 적극 협조하기로 한 것.  

2014년 1월 하얼빈역에 개관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의 누적 관람객이 지난 9월 현재 20만명을 돌파했다.
기념관 관계자들에 따르면 개관 초기에는 우리 교민과 한국인이 주로 찾았으나 최근에는 안 의사의 진가를 인정하는 중국인들이 관람객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중국정부가 올해 항일전쟁 승리 70주년을 맞아 안중근 기념관을 널리 홍보한 결과로 풀이된다.

이에 대해 한 외교 전문가는 “한-중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해 사과와 반성을 함께 요구하고 있다”며 “안중근 의사는 한-중간 교류협력을 강화하는 매개체로서도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청소년 교류사업도 추진되고 있다. 한중도시교류협회는 최근 중국 뤼순시와 '안 의사 역사교육 청소년 교류'를 추진에 합의했다. 한국 청소년들이 뤼순감옥을 방문해 안 의사의 자주독립과 평화사상 등을 배우게 된다.  

<>남-북, 안 의사 유해발굴 공동조사 전망

105년간 행방이 묘연한 안 의사의 유해 찾기도 본격화될 전망이다. 전문가들과 정부부처에 따르면 안 의사의 유해는 그가 처형된 감옥 인근 야산인 ‘동산파(東山坡)’에 매장돼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뤼순감옥의 의사 등이 안 의사가 동산파에 묻혔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증언들이 나오고 있다.
국가보훈처는 최근 중국정부와 수차례 접촉하고, 동산파에서 유해 발굴을 위한 조사를 허가해 달라고 중국측에 요청했다. 

황교안 국무총리도 지난 11월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에게 "중국 현지에서 정밀한 조사가 이뤄질 수 있도록 적극 협조를 해달라"고 당부했다.

리 총리는 "안중근 의사는 중국 국민에게도 영웅이다. 한국 국민들의 심정을 잘 이해하고 있다"며 협력을 약속했다. 
유해 발굴은 북한과의 공조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중국정부는 안 의사의 유해는 북한도 ‘소유권’을 주장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남북한이 공동조사에 나서기를 바란다는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국가보훈처는 남북 당국자 회담 때 유해 발굴을 공동의제로 상정할 계획이다. 

<>도마 안중근, 그는 누구인가

안중근 의사는 1879년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 출생했다. 6세 때 조부가  설립한 서당에서 한학교육을 받을 정도로 어려서부터 영민했다.

‘약관(16세)’의 나이에  부친 안태훈이 조직한 신천의려군 선봉장으로 용맹을 떨쳤다. 백범 김구 선생과의 만남도 이 때다. 1897년(19세)에 홍석구 신부(J.Wilhelm, 빌렘)로부터 ‘도마(Thomas)’로 세례를 받았지만 1899년 뮈텔 주교에게 대학 설립 건의, 받아들여지지 않자 프랑스어 공부를 단념했다. 중국 상해를 방문한 건 1905년(27세). 독립기지 건설을 위해서다. 29세에는 국채보상운동 참가하고, 광산사업을 위한 삼합회 설립했다. 같은 해 경흥을 거쳐 포시에트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했다. 

1908년(30세)에 ‘해조신문’에 ‘인심결합론’을 발표하고, 이듬해 김기룡 등 11인과 그 유명한 단지동맹을 결성한다. 러시아 의장대 사열 후 일본 환영단으로 향하던 이토에게 3발을 발사해  절명시킨다.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러시아군에 체포되자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세번 외쳤다.

옥중에서 ‘안응칠 역사’를 기술한다. 32세(1910년)에 사형을 선고받고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고,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안 의사의 동생들이 유해 인도를 요구하나 일제는 이를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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