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의 ‘반세기 삿대질’... 문화가 세상을 바꾼다
남북한의 ‘반세기 삿대질’... 문화가 세상을 바꾼다
  • By 이준성 기자 (jslee@koreaittimes.com)
  • 승인 2016.08.25 13: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북한은 박근혜 대통령의 광복 71주년 경축사를

“북한 당국의 간부들과 모든 북한 주민 여러분, 어떠한 차별과 불이익 없이 동등하게 대우받고 각자의 역량을 마음껏 펼치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역대 최초로 북한 정권이 아닌 노동당 및 인민군 간부, 그리고 주민들에게 메시지를 전했다.

박 대통령이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호사가들은 “탈북하라”고 읽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뒤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의 태영호 공사가 탈북해 입국한 사실이 전해졌다. 대통령이 태 공사의 탈북을 바탕에 깔고 한 발언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박 대통령의 대북 메시지는 강변 일변도를 걷고 있다. 22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최근에는 북한 엘리트층조차 무너지고 있고, 북한의 주요 인사들까지 탈북과 외국으로의 망명이 이어지는 등 심각한 균열 조짐을 보이면서 체제 동요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며 북한 비난 수위를 높였다.

또한 “북한 정권이 주민들의 삶은 도외시한 채 지속적인 공포통치로 주민들을 억압하고 있다"며 김정은 위원장을 직접 겨냥했다.

24일에는 군부대를 방문해서는 "(1인 독재) 김정은의 성격이 예측이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위협이 현실화될 위험성이 매우 크다”며 북한을 자극했다.

백번 맞는 말로, 이견(異見)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싸움에서 어느 일방이, 변명만 늘어놓거나 상대방의 약점만 집요하게 지적하면 관계개선은 요원하다. 그게 백번 옳은 말이라도 화해할 의지가 있다면, 고깝지만 속내는 접어 둬야 한다. 남북관계가 저잣거리 필부(匹夫)들의 싸움도 아니다.

통일의 전범(典範)으로 평가되는 독일은 안 그랬다. 동독과 서독은 1970년 3월 동독의 에어푸르트에서 첫 번째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5월에 서독 카쎌에서 두 번째 정상회담을 열어 ‘공식교류’를 선언한다.

1969년 사민당의 정권 교체를 통해 서독의 총리가 된 빌리 브란트의 이른바 ‘동방정책(Ostpolitik)’의 시작이다. 브란트 총리와 슈토프 동독 서기장이 통일의 서막을 열기위한 역사적인 만남이다. 브란트는 이 때부터 소련과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총력전을 펼친다.

때마침 1971년 동독에서도 서기장으로 ‘유연한’ 호네커가 집권해 브란트와 호흡을 맞춘 결과, 불과 2년 뒤인 1972년에 동서독 관계 정상화를 위한 기본협정을 체결했다. 1973년에는 동서독이 UN에 동시에 가입한다.

기본협정과 관련, 남북한은 1991년 12월 서울에서 남북고위급 회담에서 남북기본합의서(南北基本合議書)를 채택하는데, 남북한의 화해와 공존, 통일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독일의 그것과 같은 내용이다.

앞서 남북한은 1991년 9월 UN에 동시 가입한다. 이는 UN이 남북한을 각기 다른 주권을 갖는 국가로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해와 협력을 내용으로 하는 ‘기본합의서’와 UN 동시 가입이 동서독에 비해 훨씬 늦었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동서독은 1970년 정상회담 개최 이전부터 편지와 전화 연락이 가능했으며, 회담 이후에는 ‘적성국’ 관계에도 상호방문은 물론, 서로의 출판물과 방송을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동서독이 체결한 기본협정이 효력을 발휘한 것인데, 여기에는 상호 주권의 존중과 현 국경의 존중, 국민 상호 교류가 담겼다.

이에 따라 1974년에는 동서독에 상주대표부가 설치됐고, 동베를린에는 서독 언론인들이 동독에 상주하면서 동독의 소식을 서독으로 타전했다. 동독 국민들 역시 서독의 텔레비전을 통해 자본주의를 접할 수 있었다.

특히 서독인들은 자유롭게 동독을 여행할 수 있었고, 동독인들은 약간의 제약이 따라 동독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

서독은 명분을, 동독은 실리를 취하며 점진적으로 교류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양국 관계가 진행되면서 드디어 1989년 11월 9일 저녁,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국경을 지키던 초소들의 문이 활짝 열린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다음해인 1990년 10월 3일 독일의 재통일이 정식으로 선포된다.

동독과 서독은 20년간 상호체제를 인정하면서도 미·소(美·蘇)간 냉전(Cold War)의 틈바구니에서 동독은 소련의, 서독은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끊임없이 경쟁하고 또 교류했다.

동서독의 통일은 소련의 붕괴와 궤를 같이 한 게 분명하지만,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그나마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상호 이해와 존중이 바탕이 됐다.

앞서 언급했지만 남북관계를 돌아보면, 노태우 전 대통령의 최고 치적으로 평가 받는 ‘북방외교’의 성과물인 남북기본합의서는 휴지조각이 된 지 오래다.

김영삼 정권 초기에 잠시 효력을 발휘하는 가 싶더니 북한의 영변 원자로를 문제로 남북관계는 살얼음 위를 걷게 됐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면 잠깐 햇볕을 보다가 보수정권 10년 동안 남북관계는 최악을 치닫고 있다. 그나마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도 미국 공화당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한계를 맞았다.

또한 남북한은 1991년에 UN에 각각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으로 가입했으면서도 남북은 서로의 체제와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3통(통신 통행 통관) 조치로 남북교류가 꽉 막힌 상태에서 지난 1월 6일 북한의 제4차 핵실험으로 개성공단마저 폐쇄된다.

1970년대부터 동서독 국민들은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고 서로의 출판물과 TV를 접할 수 있었다. 동서독의 통일은 ‘정치가 아닌 문화가 세상을 바꾼다’는 명제를 실증한 대표적인 사례다.

남북한은 광복직후인 1948년 12월 1일 발효된 국가보안법(國家保安法)으로 인해 민간교류가 원천봉쇄 당했다. ‘이현령, 비현령(耳懸鈴 鼻懸鈴)’이라고 했다. 찬양·고무죄는 어디든 걸려면 다 갈린다.

남한 국민들은 김정은 정권이 조선중앙TV를 통해 박 대통령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내용을 남한 TV로 시청한다.

북한 인민들은 조선중앙TV에서 박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을 '독재자'라고 비난하는 장면을 볼 것이다. 저쪽이나 이쪽이나 국민들은 ‘방송국’이 틀어 주는 것만 봐야 한다. 개별시청은 국가보안법 위반이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가릴 필요 없다. 남북이 철책을 쳐 놓고 반세기가 넘게 서로 삿대질과 욕만 퍼부어댄 결과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ABOUT
  • CONTACT US
  • SIGN UP MEMBERSHIP
  • RSS
  • 2-D 678, National Assembly-daero, 36-gil, Yeongdeungpo-gu, Seoul, Korea (Postal code: 07257)
  • URL: www.koreaittimes.com | Editorial Div: 82-2-578- 0434 / 82-10-2442-9446 | North America Dept: 070-7008-0005 | Email: info@koreaittimes.com
  • Publisher and Editor in Chief: Monica Younsoo Chung | Chief Editorial Writer: Hyoung Joong Kim | Editor: Yeon Jin Jung
  • Juvenile Protection Manager: Choul Woong Yeon
  • Masthead: Korea IT Times. Copyright(C) Korea IT Times, All rights reserved.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