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운동'과 과거의 '여성운동'
'미투운동'과 과거의 '여성운동'
  • 정연태
  • 승인 2018.05.08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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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산업혁명정책포럼회장 정연태
정연태 제4차산업혁명정책포럼회장 

 

최근들어 미투운동이 일어나면서 성적피해를 당한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미투운동이 과연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여권신장에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일까?  일제 강점기때 소위 '신여성'으로 불렸던 몇사람들의 삶을 살펴보자

1920, 30년대 여성운동을 이끌었던 나혜석, 김원주(필명 일엽), 김명순, 박인덕은 공교롭게도 모두 원숭이띠, 1896년(병신) 같은 해에 태어났다.  1896년은 우리나라 여성해방운동의 효시가 된 여성들이 태어난 해이기도 하지만 일본에 의하여 1895년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있던 다음해로 고종과 세자가 러시아 공관에 1년간 피신을 간 '아관파천' 이 있었던 해이기도 하다

일본은 1876년(병자) 고의로 사건을 유발시켜 강화도조약을 맺은후  지속적으로 조선을 집어삼키려고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우리 역사에 가장 잘못된 국제협약이 바로 '강화도조약'이다.  그 이후 20년이 지나 명성황후 시해사건,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1907년(정미)사법권마저 빼앗기고 만다.  같은 해에 정부군마저 강제 해산이 되고, 1910년(경술)드디어 통채로 일본에게 빼앗기고 식민국가가 되고 만다

1896년에는 사실상 일본의 내정간섭이 심각할 정도였다.  그래서 서재필, 이상재등은 그해 우리나라 최초의 정치단체인 '독립협회'를 조직했다.  바로 그 무렵 훗날 이 나라의 기존 남성위주의 사회제도를 깨기위한 신여성들이 탄생했다.  이들은 1920, 30년대 우리사회를 변화시키는데 앞장선다.

탄압과 억압받고 있는 식민생활과 일본에 대한 저항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19년(기미) 3.1절 독립운동 행사준비에도 가담하였다.  나혜석은 최초의 여성서양화가, 문학가로서 '근대 신여성'의 효시가 되었다.  '인형이 되기를 거부한 영원한 신여성,' 나혜석은 조선미술의 역사 그 자체였다

1913년 18세때 진명여고를 수석졸업하고, 일찍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  일본 유학시절 만난 첫사랑, 시인 최승구가 1916년 갑자기 폐병으로 사망하자 큰 충격을 받는다

그 이후 인생의 첫 좌절과 절망감을 잊기위해 작품활동에 몰입하면서 1918년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한다.  1920년 25세때 10년 연상이며 상처한 적이 있는 변호사 출신 외교관 김우영과 결혼했다.  1923년 28세의 나이로  나혜석은 '어머니된 감상기'를 발표한다.  1927년 32세때, 남편과 구미 여행을 떠나 본인은 파리에서 그림공부를, 남편은 영국에서 법학공부를 한다.  그때 나혜석은 파리에서 천도교 도령인 최린이란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2년후 1929년 귀국길에 오르지만 최린과의 관계가 문제가 되어 1930년 35살 나이에 이혼을 당한다.  1934년 39세때 '이혼고백장', 1935년 '신생활에 들면서'를 서울서 발표하지만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한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가 되기를 거부하오 내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줌의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멋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것이다", [이혼고백서] 중에서 ..

나혜석의 예언대로 오늘날 우리나라의 여성들은 그 어느나라보다 자유분망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나혜석은 그 당시로서는 사회적, 경제적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엘리트여성이었다.  그녀의 여성해방론은 가부장적 사회제도와 남성중심의 세계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었다.

종래 금기시 되었던 섹슈얼리티에 대한 남녀불평등까지 포함하여 그간 수백년간 지켜졌던 정조관념을 깨부수고자했다.  그러나 그녀는 죽기전까지 보고싶은 세자녀들을 보지 못하는 고통속에서 살았다.  여성으로서는 해방을 부르짖었지만 천륜에서 해방된것은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강한 모성애를 가진 여성이었기 때문이었다.

1938년 '해인사의 풍광'이란 마지막 글을 발표했고, 절친이던 김원주(일엽스님)가 있던 수덕사 입구의 '수덕여관'에서 1943년까지 그림을 그리면서 지냈다.  나혜석은 파키슨병에 걸려 서울 원효로의 시립자제원이란 요양원에서 오래동안 병마와 투쟁을 해오다가 1948년12월10일,  쓸쓸하게 53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려면 남성자신부터 정조를 지키라고 했을뿐만 아니라 정조라는것은 남이 강요할수 있는것이 아닌 주체의 자유의지에 속하는 '취미'의 문제다"라고까지 했다.  이런 주장은 그 당시 사람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대단한 도전이었다!

신여성 나혜석의 삶은 사회와 제도에 대한 도전 그 자체였다.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고 여성의 권리와 지위 향상을 위해 지혜와 용기있는 여성리더들이 그리운 시절이다.  앞으로 나혜석과 같은 '신여성'들이 많이 나타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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